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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심장부를 점령한 고구려

           

           

          우리는 한국역사상 최초의 정복군주가 광개토호태왕(374~413)이라고 가르치고 배워왔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교육은 건국 초에 이미 대제국을 건설한 고구려 역사를 압록강 유역의 약소국으로 왜곡한 일본의 식민지교육을 추종하는 왜곡된 역사교육이다.

          또한 서기 49년에 이미 중국 동북 지방인 낙랑군, 현도군, 요동군, 요서군, 어양군, 우북평군, 상곡군을 정벌하고, 중국의 심장부인 태원군까지 점령한 모본왕의 정복역사를 말살한 일본의 식민지교육을 그대로 추종하는 엉터리 역사교육이다.

           

          왜냐하면 서기 49년에 고구려 모본왕이 이미 중국(후한)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후한의 역사서인 『후한서』에,

           

          광무제 25년(서기49) 봄에 고구려(모본왕:서기48년~서기52년)가 우북평군, 어양군, 상곡군, 태원군을 침략하여 약탈하였다. 요동태수 제융(祭肜)을 특사로 보내어 은사(恩賜;광무제가 보내는 재물)와 믿음(앞으로도 계속 재물을 보내겠다는 믿음)으로써 초무(招撫;불러서 어루만져 위로)하였다. 모든 변경지역이 다시 수복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도 같은 기록이 있다.

          왕망(王莽)이 전한(前漢:서기전206년~서기8년)을 멸망시키고, 신(新서기8년~서기25년)나라를 건국하였다. 광무제 유수(劉秀)가 그 신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군웅들을 제압하고 건국한 통일국가가 후한(後漢:서기25년~서기220년)이다.

          중국의 사관들은 주나라 이전부터 그 나라에서 매일매일 일어나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일일이 기록한다. 그 나라가 멸망한 후, 후대 왕조가 국가적 사업으로 그 기록들 중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판단한 부분들만 모아서 역사서를 편찬한다. 이렇게 중국 왕조가 편찬한 중국의 역사서를 정사(正史)라고 한다.

          송(宋:서기420년~서기478년)나라 황제의 명으로 범엽(398년 ~ 445년)이 편찬한 후한의 역사서가 『후한서』이다.

          따라서 『후한서』의 기록은 후한(後漢)의 사관들이 각각의 역사적 사건들을 직접 보고 들은 내용들을 기록한 것 중에서 중요한 것만 골라서 모아놓은 역사적 사건들이다.

          고구려가 중국(후한)의 수도인 낙양의 턱밑에 있는 태원군까지 점령한 사건은 중국 측에선 부끄러운 기록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고구려에게 정벌당한 치욕적인 기록을 범엽이 거짓으로 만들어 『후한서』에 넣었을 리 없다.

            오히려 『후한서』에 수록된 고구려의 후한 정벌기록은,

           

          ① 고구려가 중국의 낙랑군, 현도군, 요동군, 요서군을 넘어 우북평군, 어양군, 상곡군, 태원군까지 한반도 넓이만한 중국 영토를 정복하였다.

          ② 후한의 수도인 낙양의 턱밑에 있는 태원군까지 점령당하자,

          ③ 곧 낙양마저 침공당할 것이라는 공포가 낙양을 휩쓸었다. 이에 후한의 황제(광무제)가 황급히 고구려와 친교가 있는 요동태수 제융(祭肜)을 특사로 보내어,

          ④ 많은 재물을 전쟁 보상금으로 지급하고 앞으로도 매년 재물을 보내겠다고 사정하면서 철군을 간청하자,

          ⑤ 고구려가 낙랑군, 현도군, 요동군, 요서군, 우북평군, 어양군, 상곡군, 태원군 등을 후한에 돌려주고 회군하였다.

           

          는 역사적 사실을 축소, 은휘, 왜곡한 기록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초, 중, 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의 작은 나라로서 남쪽으로는 청천강(혹은 압록강)을 경계로 낙랑군이 있었고, 서ㆍ서남쪽의 요동반도에는 요동군이 있었으며, 북서쪽 심양 주위에는 압록강유역에 있다가 옮겨간 현도군이 있었고, 요하의 서쪽에 요서군이 있었다는 일제식민사학을 계승ㆍ추종하는 이들이 한국 고대사학계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① 고조선 영역이 요하의 동쪽으로 한정되었는데,

          ② 연나라 진개의 동침으로 청천강(혹은 압록강) 이북 지역을 잃고, 한반도의 약소국이 되었고,

          ③ 요하의 동쪽으로부터 청천강(혹은 압록강) 북쪽에 이르는 땅에 요동군이 설치되었으며,

          ④ 위만이 조선의 준왕으로부터 나라를 빼앗아 위만조선을 건국하였고,

          ⑤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 현도군, 임둔군, 진번군, 대방군 등을 두어 한반도 북부를 식민지배하는 중에,

          ⑥ 주몽이 압록강 유역에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⑦ 고구려가 서기 313년 낙랑군을 멸하고, 서기 314년에 대방군을 멸함으로써 비로소 한반도 북부를 영토로 하게 되었다.

          ⑧ 따라서 고구려는 주몽의 건국으로부터 약 350년 동안 압록강 유역의 작은 나라에 머물러 있었다.

           

          이렇게 한국사를 왜곡한 사대주의사관, 일제식민사학을 계승ㆍ추종하는 이들로서는 한나라 군현들로 포위당한 압록강 유역의 작은 나라인 고구려가 우북평군, 어양군, 상곡군, 태원군 등을 점령했다는 『후한서』의 기록을 믿을 수도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으며, 알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 고구려 모본왕이 중국의 심장부를 점령했던 한국사는 가르쳐 지지도, 배울 수도 없었고, 모본왕이 누구인지 아는 이조차 없게 된 것이었다.

           

          위 내용은 김종서 박사의 연구서인 『기자 위만조선 연구』『부여 고구려 백제사 연구』『한사군의 실제위치 연구』『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비정 연구』『한국사 교과서 바로잡기 1000장면』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더 자세한 것은 역사모(www.yeoksamo.com) 홈페이지나 도서관ㆍ서점 혹은 천손(www.cheonson.net) 홈페이지를 찾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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